걷고의 걷기일기

[걷고의 걷기 일기 0274] 나는 왜 걷는가?

걷고 2021. 9. 16. 20:19

날짜와 거리: 20210912 - 20210915 40km
코스: 서울 둘레길 양재 시민의 숲에서 사당역까지 외
평균 속도: 2.4km/h
누적거리: 4,885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일주일 후에는 지리산 둘레길을 걷기 위해 떠난다. 열흘 간 아무 생각 없이 걸을 수 있다. 이 계획을 구상하고 아내의 허락을 받은 날부터 삶에 더 많은 활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집에서 하고 싶은 일 하며 지내는 것도 전혀 불편하지 않고, 어느 정도 루틴이 형성되어 단순하고 편안하다. 그럼에도 가끔은 자신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줄 계기가 필요하다. 이번 길이 내게는 아주 좋은 계기이다. 같이 갈 수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을 취했고, 최종적으로 세 명이 같이 출발하기로 했다. 서너 명은 중간에 합류하기로 했고, 다른 두 세 팀은 시간이 되는대로 동참해서 하루, 이틀이라도 함께 걷겠다고 한다. 요즘 지리산을 함께 걸을 친구들과 서울 둘레길을 걷고 있다. 오늘은 양재 시민의 숲에서 사당역까지 걸었다. 여러 번 같이 걸은 친구들이라 서로 맞춰가며 즐겁게 걸을 수 있었다. 오랜 기간 인연을 이어 온 친구들과 함께 취미를 공유하며 즐겁게 살아가는 것은 중장년 또는 노년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같이 걸을 수 있는 친구들이 있고, 수다를 떨 수 있는 친구들이 있고, 마친 후 막걸리 한 잔 마실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다. 이런 일을 함께 즐기기 위해서는 건강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만나고, 걷고, 수다를 떨고, 막걸리 한 잔 마시고, 다음 길을 약속할 수 있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반증이다.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지내기 위해 나 자신의 건강과 친구들의 건강을 동시에 챙겨야 한다.

오늘 길에 한 친구가 블루투스 스피커를 들고 와서 음악을 틀었다.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음량이 풍부하고 그냥 너무 좋았다. 마치 미개인이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놀란 느낌이 들 정도로 신선했다. 가끔 홀로 걸으며 음악을 듣고 싶어서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잦은 광고와 음질이 좋지 않아 음악 듣는 것을 포기하고 있던 차에 친구가 멋진 음악을 틀어주니 너무 좋았다. 60 대 후반의 선배는 최근에 BTS 팬이 되었고, 그들이 최근에 리메이크 해서 불렀던 ‘I will be missing you’라는 노래를 신청했다. 선배는 그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노래 외에도 많은 노래를 들으며 즐겁게 걸었다. 흥에 겨워 친구들은 춤을 추기도 했고, 몸을 까딱거리며 흥을 돋우기도 했고,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음악이 있는 걷기는 음악이 없는 걷기와는 확연히 다르다. 활력이 넘친다. 60대 후반에 음악을 들으며 울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다. 커피 한잔을 마시고 노을을 보며 울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친구들의 격려와 배려에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이런 행복감을 별로 느낄 수 없으니 감정이 메마른 사람인 것 같다.

이런 얘기를 길동무에게 하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언제 행복을 느낄까? 길을 떠나고 걸을 때 몸과 마음이 설레고 가슴이 벅차오른다.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그리며, 춤을 추며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걸으며, 아니 걷기 출발 전부터 설렘과 기쁨이 차오른다. 지리산 둘레길을 가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삶의 활력이 충전되는 느낌이 들듯이. 요즘 걷기는 지리산 둘레길을 걷기 위한 일종의 전지훈련인 셈이다. 집에서 짐을 싸고 문을 나서기 전부터 마음이 설렌다. 또한 굳이 먼 곳을 떠나지 않고 집 뒷산을 가는 데도 가슴이 설렌다. 매일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늘 기분이 좋고, 활력을 느끼고, 하루를 충만하게 보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기분이 좋아진다. 그만큼 내게 걷기는 매우 중요한 일과이자 삶이고, 삶의 원동력이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준비해 온 친구가 고맙다. 그 친구 덕분에 지리산 둘레길을 함께 즐겁게 걸울 수 있게 되었다. 스피커를 준비해 온 친구가 흥겹게 음악을 들으며 걷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반면 나는 어떤 재미나 즐거움을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걷는 것만 할 줄 아는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 친구는 내게 “그 친구는 즐기기 위해 걷는 것이고, 너는 생존을 위해 걷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어주었다. 미처 알고 있지 못했던 점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었다. 평상시 홀로 걸을 때에는 거의 쉬지도 않고, 먹지도 않는 편이다. 배 고프면 배낭 속 음식을 꺼내어 서서 먹고 곧바로 출발한다. 걸을 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걷기만 한다. 잠시 쉬면서 나무나 꽃, 하늘을 바라보거나 새 소리나 물소리를 듣는 여유도 없이 그냥 걷기만 한다. 내게 걷기는 즐거움이 아니고 그냥 걷는 것 자체뿐이었다.

지리산 둘레길을 준비하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출발지와 첫날 숙소만 확인한 후 나머지는 현장에서 해결하는 스타일이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전체 일정과 코스, 숙박, 식사 등 자세한 내용을 확인한 후에 떠나는 것을 선호하는 것 같다. 나는 여행을 불확실함 속에서 두려움과 불편함을 겪으며 삶의 방식과 관점의 변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확실함 속에서 일상을 벗어난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생각의 출발 자체가 많이 다르다. 옳고 그름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여행, 트레킹, 걷기에 대한 태도, 습관, 방식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 친구가 한 말은 내게 큰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생존을 위한 걷기인가, 아니면 즐거운 생활을 위한 걷기인가? 어떤 삶을 추구하는 가에 대한 화두이다. 친구 말을 들으니 나의 걷기는 생존을 위한 걷기였다. 걷는 것 외에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도 않았고, 못했다. 경치를 즐긴 것도 아니고, 향토 음식을 제대로 즐겁게 맛본 것도 아니고, 사람들과의 교류를 즐긴 것도 아니고, 사계를 느낀 것도 아니고, 그냥 걷기만 한 것이다.

이번 지리산 둘레길은 그런 면에서 걷기에 대한 나의 근본적인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지금 나의 방식이 모두 잘못되었고 반드시 변화될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나의 방식을 고집하지 말고 보편적인 의견을 따라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늘 자신에게 던졌던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나는 왜 걷는가?” 그냥 "걷기 위해 걷는다"라는 답변은 아직 답변을 못 찾은 답변이다.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 걷는다"라는 답변 역시 올바른 답변은 아니다. 이 근본적인 질문이 오늘 받은 화두이다. 죽을 때까지 답을 못 찾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걷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홀로 걷지 않고 친구와 함께 걷고, 음악을 들으며 걷는 것 자체가 이미 큰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변화를 수용하는 것이 화두를 풀어가는 방편이 될 수도 있다. 오늘 받은 화두와 함께 이번 지리산 둘레길 걷기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고조되고 있다. 기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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