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 일기 0260] 게으름의 날
날짜와 거리: 21210809 9km
코스: 마포중앙도서관 - 월드컵공원 – 불광천
평균 속도: 4km
누적거리: 4,596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지난주 토요일이 입추였고, 오늘이 말복이다. 더위가 물러가고 있다. 농경사회인 우리나라에서 계절의 변화에 맞춰 시기적절한 준비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지방에서 사과 농사를 하는 친구가 있는데, 농사는 자연의 순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고 한다. 날씨를 변화시킬 수는 없는 일이기에, 자연의 순리에 따라 농사를 하면서 저절로 마음 비우는 연습을 하게 된다고 한다. 날씨 탓을 할 수도 없는 일이고, 탓을 해도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길 턱이 없고 오히려 마음만 다치게 된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별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할 수 없는 일에 매달리지 말고, 할 수 있는 일에 몰입하며 살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삶의 지혜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 반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온갖 에너지를 낭비하며 지치고 힘들어한다. 그러면서 주변 사람들과 상황, 자신을 탓하며 살아간다. 할 수 없는 일은 포기하고,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신문을 보니 오늘이 ‘게으름의 날’이라고 한다. 누가 어떤 이유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날이다. 이 날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처음 듣는 날이지만, ‘게으름의 날’이라 하니 더욱 게을러지고 싶다. 누가 왜 이런 날을 지정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어떤 태도로 이 날을 받아들이느냐가 오히려 더욱 중요하다. 올해부터 내 생일 준비를 하지 말자고 했다. 60년 이상 생일을 맞이했지만 나이 들어가면서 딱히 생일이 별 다른 날이 아니라는 것을 점점 실감하게 된다. 오히려 생일은 낳아주신 부모님께 맛난 음식을 대접하는 날이 되어야 할 것 같다. 부모님이 안 계시니 감사함을 표시할 수도 없다. 아내와 아이들 부담 주고 싶지도 않고, 나이 들어가는 것을 축하하는 모습도 그다지 반갑지 않다. 손주들 만나는 날이 내 생일이고, 손주들 생일이 내 생일이다라고 생각하며 손주들 생일을 챙기고 가족끼리 함께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훨씬 더 즐거운 나날이 될 것이다.
선후배와 소통하는 단톡방이 있다. 대학 시절 영어회화 서클에서 만난 선후배들이다. 나 포함 네 명이 가입되어 있다. 40년 이상 알고 지내온 오랜 사이라서 굳이 말이 필요 없는 편안한 관계이다. 가끔 의견과 표현 방법이 달라서 삐치기도 하지만, 다음에 만나면 이미 그 기억은 사라지고 다시 반가운 마음으로 만나 수다를 떨고 웃고 지낸다. 망각의 힘은 강해지고 삐치는데 쓰는 에너지 조차 사그러진 노화증세가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네 명중 한 분이 여성 선배인데 8월 15일에 자신의 집에서 생일잔치를 하자고 한다. 남자 세 명의 생일이 우연히 모두 8월이다. 음력 8월도 있고, 양력 8월도 있지만 아무튼 모두 8월 생이다. 각자 음식을 나눠 준비해서 만나기로 했다. 후배는 샐러드와 디저트를, 다른 선배는 해산물을, 나는 와인을, 집주인인 여성 선배는 고기를. 생일을 핑계삼아 멋진 모임이 될 것이다. 선배의 초대에 감사하고, 우리들 인연에 감사한다.
‘게으름의 날’에 무엇을 해야 하나? 이런 생각 자체는 ‘게으름의 날’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생각 자체도 내려놓고 그냥 하루 최대한 부지런하게 게으름을 피우면 된다. 할 일이 없는 백수가 어떻게 더 이상 게으름을 부릴 수 있을까? 바쁜 사람들에게 게으름은 휴식이고 치유며 재창조를 위한 중요한 일이다. ‘게으름’은 ‘부지런함’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늘 게으른 사람에게 게으르게 살라고 하면 이 또한 모욕이 될 수도 있다. 바쁜 사람에게 더 바쁘게 살라는 것과 같은 말이다. 게으름은 부지런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설사 그런 특권이 게으른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해도, 그들은 게으름을 누릴 수 없다. 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누릴 수 없다. 물속에서 살아가는 물고기들에게 헤엄치며 살아가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게으름과 부지런함,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좋음과 나쁨, 태어남과 죽음, 깨끗함과 더러움 등은 상대적인 단어지만 서로 의존하며 상존한다. 상대되는 단어가 사라지면 다른 단어는 저절로 생명력을 잃게 된다. 우리 모두 이런 양면성을 갖고 있다. 양면성은 생존에 필요한 소중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자신에게 필요한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양면성을 인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의 내면에 선악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선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이해는 사람 관계를 원만하게 만들어주며 서로 돕고 아끼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자신 내부에 존재하는 양면성의 통합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의 단점과 장점을 모두 인정하게 되면 자신을 과대 포장하거나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하게 된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말을 뻔뻔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된다. 반면, 단점을 감추려 하면 할수록 점점 ‘참 자기’와 멀어지는 언행을 하게 되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자신의 양면성을 인정하는 만큼 우리는 편안해진다. 그와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약점과 장점을 통합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도 갖게 된다. 사회적인 동물인 우리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 사회생활이 힘든 이유는 사회생활 자체보다도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맞는 말이다. 사람들이 일을 하고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이 사회이고 사회생활이기 때문이다.
‘게으름의 날’ 할 일이 없으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글 쓰는 행동이 ‘게으름의 날’에 맞는 행동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오늘은 좀 더 충실하게 게으른 하루를 보내고 싶다. ‘게으름의 날’이 내게 부담되는 과제를 부여했다. 백수가 더 백수가 되어야 한다. 더 이상 어떻게 게으를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한다. 일상이 백수인 내게 최고의 게으름은 아주 충실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글 쓰는 일이, 걷는 일이, 책 읽는 일이, 명상하는 일이 게으름을 피우는 가장 확실하고 충실한 방법이다. 다만 그 게으름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 늘 안타깝고 분할뿐이다. 앞으로 더 충실하고 부지런하게 게으른 삶을 살아가겠다고 ‘게으름의 날’에 다짐한다. 한 선배는 백수가 너무 바쁘게 살아간다고 타박한다. 그 선배가 반드시 이 글을 읽었으면 좋겠다. ‘게으름의 날’을 맞이하여 이미 게으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그런 삶을 살지 말라는 것은 ‘게으름의 날'에 크게 위반되는 발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