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일기

[걷고의 걷기 일기 0254] 어느 가장의 이야기

걷고 2021. 7. 29. 11:21

날짜와 거리: 20210728 4km

코스: 일상 속 걷기

평균 속도: n/a

누적거리: 4,491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수개월 전에 SNS 구독자 중 한 분이 메시지를 보내서 한번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때 만나서 약 한 시간 정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의 얘기를 들으며 그가 왜 나를 만나고 싶어 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생면부지의 사람인 나를 단순히 글에 나타난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만나고 싶다는 그의 적극성과 절실함이 느껴졌다. 그의 삶과 나의 삶이 비슷한 점이 많다고 했다. 그는 나보다 열 살 연하이다. 내가 과거의 힘든 시간을 어떻게 버텨냈는지 또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모습이 잘 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조심스러웠다. 누군가의 롤 모델이 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나의 삶의 방식이 괜찮다고 얘기할 만할 형편도 아니었다. 다만 글을 통해서, 또 글을 쓰면서 삶을 다듬어 나가고 있을 뿐이다. 그를 어제 다시 만났다. 점심 식사를 한 후에 찻집에서 차 한잔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이어나갔다.


 그는 큰 자금을 운용하는 자금운용사 임원으로 근무했다. 조 단위 이상의 자금을 운영하는 회사의 임원이며 펀드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무리한 투자로 수사를 받게 되었고, 1심에서 실형이 확정되었다. 1심 결과가 나오는 데까지 몇 년이 걸렸다. 지금 2심을 준비하고 있다. 2심 판결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삶이 오리무중이고, 그 안에서도 지루한 법정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법정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고 ‘판결’을, 즉 최종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자신을 내려놓은 사람은 싸움을 하지 않고 기다리며 결과를 수용할 뿐이다. 지난 8년을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삶의 긴 터널 속을 걸어가야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삶은 사람을 지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는 그럼에도 꿋꿋하게 버티며 걸어가고 있다. 그의 의지가 놀라웠다.


 8년의 힘든 세월은 그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다. 사람들에 대한 원망도 많았고, 분노로 힘들어했으며,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기는 더욱 힘들었다. 누군가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자신을 해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웃으며 얘기하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동시에 반가웠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에 동지를 만난 반가움에서였다. 늘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해야만 하는 삶을 살아온 그로서는 통제를 할 수 없는 상황 자체가 주는 불안감과 공포가 무척 괴로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상황을 수용하고 극복하기 위해 정신과 치료까지 받으며 버티며 살고 있다. 그런 그에게 짐이자 버팀목이 된 것이 바로 가족이다. 아내와 두 아들이 있다. 두 아들은 모두 장성해서 대학생이 되었고, 아내는 힘든 상황을 티 내지 않으며 그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 그는 수형생활을 준비하기 위해 바둑이나 장기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이 너무 처절하게 들렸다. ‘수형생활을 준비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실형 받을 준비를 마쳤다는 것이다. 수형 생황을 위해 사전 연습하듯 뭔가를 배운다는 그의 모습에서 장수가 전장에 나가는 비장함이 느껴졌다.

 그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고민하고 생각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오직 오늘 하루 충실하게 보내는 것을 목표로 살고 있다. ‘살고 있다’는 말은 ‘버티고 있다’로 해석되어야 한다. 일주일에 세 번 정도 개인 트레이닝을 받고, 거의 매일 걸으며 심신을 단련하고 있고, 책을 읽으며 지낸다고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실은 그일 외에 별 다른 일이 없을 것이다. 나의 삶에 대입하면 그의 삶이 저절로 그려진다. 이런 비슷한 삶의 모습 때문에 나와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비록 그 만남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든 안 되든,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서로 얘기를 나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편안함이 있다. 그런 편안함은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는 여유 공간을 만들어 준다. 그 공간을 통해서 치유받고, 힘을 얻고, 다시 버티며 살아갈 수 있다.


 그는 가장이다. 모든 가장이 그렇듯 자신의 삶보다 아내와 자식들의 삶이 더 걱정이다. 그런 걱정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이다. 그런 면에서 가족은 ‘짐’이다. 하지만, 힘든 상황을 버티게 만들어주는 것도 바로 가족이다. 그런 면에서 가족은 ‘삶의 원동력’이 된다. ‘짐’이 ‘삶의 원동력’이 된다. ‘짐’은 ‘짐’이 아니고 ‘희망’이 된다. ‘희망’을 추구하는 과정은 험난하지만 ‘희망’이 있기에 험난한 과정을 버틸 수 있다. ‘험난한 과정’은 우리를 단련시킨다. 자신을 내려놓게 만들기도 하고 날카로운 면을 부드럽게 만들기도 하며,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벽을 허물며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간다. 하나가 되면서 자신의 크기가 확장된다. 인생의 고통은 반드시 고통만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에게 큰 선물을 안겨준다. 사랑, 겸손, 용서와 화합, 삶의 여유, 미소 등이 그 선물들이다. 


 그는 내가 증권에 관심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전문가로서 조언을 해주기도 했고, 책도 세 권이나 추천해줬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그가 처한 상황에서 누군가의 관심사에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어쩌면 삶의 고비를 넘은 것이 아닐까? 한 치 앞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가 주린이를 위해 책을 추천하는 여유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가능하면 많은 일상을 공유하며 아내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며 살고 싶다고 했다. 자식들이 자신들의 꿈을 잘 실현할 수 있을지를 걱정하고 있다. 그는 이미 자신의 걱정을 뛰어넘은 것을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신의 걱정과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가족을 생각할 여유조차 갖기도 어렵다. 8년의 세월이 그를 자신의 늪에서 끌어낸 것이다. 그 세월을 견뎌낸 것도 대단하지만, 삶의 늪에 빠지지 않고 벗어난 것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에게 격주 단위로 만나 함께 걸으며 얘기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상담을 진행하며 상담실이 아닌 열린 공간에서 자유롭게 걸으며 상담을 진행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생각해 온 ‘걷기 상담’이다. 8월 초에 한 명의 내담자와 ‘걷기 상담’을 시작하기로 예정되어 있다. 그에게도 이 ‘걷기 상담’을 제안했고, 기꺼이 참석하겠다고 했다. 걸으며 걷기 명상도 하고, 얘기도 나누고, 침묵 걷기도 하고, 스트레칭을 하면서 몸의 감각 집중을 통한 생각 떨쳐버리는 연습도 하고, 종소리 명상으로 마무리 짓는 프로그램이다. 그에게 작은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제안했다. 


 그와 헤어져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지금 나를 돌아봤다. 그냥 덤덤하다. 힘든 기억들은 많이 사라졌다. 사람들을 원망하는 마음도 별로 없다. 화를 내면 몸이 아프다. 뭐든지 무리하면 몸이 신호를 보내온다. 지금 삶이 재미가 없다는 어제의 글은 ‘자극적인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의 나는 변해가고 있고 ‘심신한 재미’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재미’라는 단어는 잘못 선택된 단어일 수도 있다. 삶은 ‘재미’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삶은 그냥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루하루 살 듯, 한 발 한 발 걷듯, 그렇게 살아가고, 늙어가고, 익어가고, 지는 것이다. 그런 삶에 ‘재미’라는 단어가 붙어있을 틈은 없다. 삶은 고비 넘어 고비다. ‘고비’는 바로 ‘삶’이다. 그게 우리네 삶이다. ‘고비’를 ‘고비’로 생각하지 않고, 그냥 ‘삶’으로 생각하면 한결 편안해진다. 오르막도 길이고, 내리막도 길이며, 평지와 사막도 길이다. 오르막은 오르면 되고, 내리막은 내려오면 되고, 평지는 걸으면 되고, 사막은 건너면 된다. ‘재미’로 걷는 것이 아니고, 가야 할 길이기에 걷는 것이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대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것은 최선의 결정입니다. 자신을 믿고 자신을 존중하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너무 잘하려고, 잘 살려고, 멋진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 말고 자신을 좀 더 아끼고 자신의 몸과 마음에 귀를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건강을 잘 유지하시길 바랍니다. 몸이 건강하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과거나 미래에 묶여 살지 말고, 현재를 살아가세요. 세월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줍니다. 그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결정은 어떤 마음과 태도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느냐 밖에 없습니다. 좋은 마음, 불편한 마음, 여유로운 마음, 조급한 마음 등은 모두 그대가 결정할 수 있는 그대의 마음입니다. 그대는 그대의 주인이니까요. 그 한순간의 마음의 선택과 결정이 그대의 미래를 만들어줍니다. ‘지금-여기의 삶’만이 그대의 ‘미래’를 약속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 일은 신경 끄세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금언을 믿어 보세요. 그리고 시간 나는 대로 걸으세요. 길 속에 길이 있습니다. 가족들이 그대를 응원합니다. 그대의 친구들과 인연 맺은 많은 분들이 그대를 응원합니다. 저 역시 그대를 응원합니다. 그대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그간 참 수고 많으셨습니다. 힘든 시간 잘 살아내셨습니다. 이제 자신에게 쉴 여유도 만들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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