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 일기 0253] 삶의 재미
날짜와 거리: 20210728 9km
코스: 일상 속 걷기
평균 속도: n/a
누적거리: 4,487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삶의 재미가 점점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니다. 그냥 무덤덤하게 하루하루 보내고 있다. 특별히 재미있는 것도 없고, 신나는 일도 없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을 만나지 못해 그럴 수도 있고, 노화 현상의 하나로 모든 일이 그저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럴 수도 있다. 다행스러운 점은 이런 상태가 그다지 불편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살아가는 것도 괜찮다. 하고 싶은 일이 한 가지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무 생각 없이 걷는 일이다. 이 역시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것이라 표현했다. 좋아하기는 하지만, 미칠 듯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그저 그렇게 좋아하고 있다.
어제는 주식 공부하는 친구들과 북한산 계곡에 들어가 닭백숙과 막걸리 한 잔 마시고 왔다. 평상 옆에 계곡 아닌 계곡이 있고, 물놀이 아닌 물놀이랍시고 발을 물에 담그고 왔다. 예전에는 이런 일이 무척이나 신났고, 즐거웠고, 흥분되기도 했다. 이제 그런 감정의 고점과 저점이 사라진 느낌이 든다. 감정의 계곡이 사라진 것이다. 좋기는 하지만, 그렇게 아주 많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냥 잠시 서울을 벗어나 서울 내에 위치한 북한산 계곡에 갔다는 일탈의 가벼운 즐거움 정도이다. 주차장에 차를 댈 곳이 없을 정도로 성업 중이다. 이런 장사는 코로나도 비껴간다. 이런 곳도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왜 재미를 느끼지 못할까? 단순한 노화 현상인가? 아직도 뭔가 마음속에 불편한 찌꺼기가 많이 남아있나? 요즘 삶은 더 이상 단순할 수 없을 만큼 단순하다. 먹고, 자고, 명상하고, 글 쓰고, 책 읽고, 걷고, 신문과 TV 보고, 딸이 보내 준 손주들 사진과 동영상 보는 일이 하루 일과다. 손주들 사진과 동영상 보면 저절로 얼굴에 웃음이 살아난다. 그 외에 별로 신나는 일도 없고, 무슨 일을 해도 그다지 신나지도 않는다. 서울 둘레길을 걸으러 나갈 때 느끼는 약간의 긴장감과 떨림 정도가 지금 느낄 수 있는 최대의 즐거움이다. 어제 한 친구가 내게 “그다지 충동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다.”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충동적인 마음이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 충동의 후폭풍을 견뎌낼 용기와 힘이 없다. 오히려 후폭풍이 두렵고 신경 쓰여서 더욱 자제하기도 한다. 특히 ‘술이 그렇다. 술 마신 후 정상으로 돌아오기까지 며칠이 걸린다. 가끔은 술 마시면서도 ‘왜 마실까? 꼭 술을 이렇게 마셔야만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많이 취하면 이런 정상적인 생각은 사라지고, 술이 술을 먹고 있다. 나는 그저 술이 지나가는 통로이자 터널에 불과하다. 내 몸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 술이 주인이 된다. 주인이 사라지고 나면 즉 술이 통과하고 나면 원래 주인인 나를 회복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고, 그 이후에 ‘괜한 짓 했다’라는 자괴감이 올라온다.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이 그다지 좋을 리 없다.
사람들 만나 수다 떨고 술 한잔 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의 하나였다. 요즘은 그 즐거움도 그다지 크지 않다. 여행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많이 다니지 못했다.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냥 좋아하는 정도이다. 명상은 하는 날과 하지 않는 날의 마음속 차이를 느낄 수 있어서 그냥 습관처럼 한다. 그리고 명상의 친구인 망상들과 씨름하거나 망상이 놀다가는 것을 바라보기만 한다. 명상할 때는 망상이 술 마실 때는 술이 나의 주인이 된다. 독서는 심심해서 또 할 일이 없어서 한다. 시간 죽이기에 독서만큼 좋은 것도 없다. 그리고 가끔 내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며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걷기 역시 별 할 일이 없어서 한다. 시간도 잘 지나가고, 건강도 지킬 수 있고, 가끔은 걷다 보면 미친놈처럼 혼자 노래를 부르거나 큰 소리를 치거나 스틱을 머리 위로 올리며 몸을 흔들기도 한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즐거운 몸짓이다. 글쓰기 역시 별달리 할 일이 없기에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을 한다는 것이고, 생각한 내용이 글을 쓰면서 좀 더 정리가 되기도 한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지금 하고 있는 일상이 할 일이 없어서 한다는 사실이다. 할 일이 없어서 ‘할 일’을 만들어하고 있다. 그나마 ‘할 일’을 만들고 찾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때는 이런 단순한 일상을 동경하기도 했는데, 막상 단순해지니 뭔가 심심하다. “명상 수행은 물 맛이다.”라고 누군가가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아무 맛도 없는 것이 수행이라는 말이다. 물 역시 아무 맛도 없는데, 물 없이는 살 수 없다. 수행 역시 아무런 재미도 없는데, 수행이 없다면 재미 대신 마음속 시끄러움이 들끓는다. 그러면 지금 나의 삶이 수행이란 말인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이제 알겠다. 나의 삶뿐 아니라 우리네 삶 자체가 수행이라는 사실을. 비록 삶의 모습이 서로 다르고 다른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고 해고, 그들에게는 그 삶만이 진실이고 실체이다. 어떤 삶도 옳고 그름이 없다. 사회의 잣대로 만든 기준은 공공의 질서를 위한 기준일뿐이다. 인간인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재단하거나 평가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 각자 자신의 몫을 살아내느라 처절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것만이 유일한 실존이며 진리다. 비록 누군가의 삶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면,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평가나 판단, 비난 대신 조용한 기도이다. 그럴 수 없다면,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이 타인을 존중할 수는 없는 법이다.
과연 나는 나를 진정 존중하고 있는가? 아직도 멀었다. ‘지금의 나’와 ‘이상적인 나’ 사이에 아직도 갈등이 남아있고, 이 둘이 싸우고 있기에 삶이 재미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하는 ‘재미’는 어쩌면 ‘일상 속 재미’와는 조금 다를 수도 있다. 이 말속에는 건방이 남아있다. 언젠가 이 둘이 평화로운 화합을 하는 날 열락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좀 더 아끼고 사랑하며 존중하는 일이 필요할 뿐이다. 지금의 단순한 ‘할 일 없는 삶’ 속에서 만들어 낸 ‘할 일’로부터 자유로울 필요도 있다. ‘할 일’이 짐이 된다고 느끼면 과감하게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반드시’, ‘꼭’, ‘무슨 일이 있어도’라는 전제 조건이 들어간 일은 자신을 행복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이런 일들은 일단 버리고 볼 일이다. 버린 후에 다시 하고 싶다면, 그 일은 진정 내가 원하는 일이고, 그 일이 내가 될 수 있다. 버리면 얻는 것이 생긴다.